영화 남매의 여름밤, 상실은 어떻게 일상에 스며드는가?

사건이 없는데도 무언가는 계속 지나간다 

윤단비 감독의 장편 데뷔작 <남매의 여름밤>은 2019년 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되어 이듬해 극장에 걸렸다. 고등학생 옥주와 동생 동주가 아버지를 따라 할아버지의 낡은 2층 양옥집으로 옮겨 가고, 얼마 뒤 고모까지 합류해 한여름을 함께 보낸다. 요약하면 이것이 전부다. 

영화 남매의 여름밤


 이 영화에는 극적인 사건이 거의 없다. 밥을 먹고, 마당의 식물에 물을 주고, 사소한 일로 다투고, 각자의 방으로 흩어진다. 그런데도 영화가 끝날 무렵 관객은 무언가 결정적인 것이 지나갔음을 알게 된다. 이 작품이 다루는 주제는 특정한 상실 그 자체가 아니라, 상실이 사건의 형태가 아니라 시간의 형태로 도착한다는 사실이다. 

집이 기억을 대신 보관한다 

낡은 양옥집이 사실상 주인공인 이유 

카메라는 인물보다 공간을 자주 오래 응시한다. 계단, 마루, 마당, 여닫히는 문. 가스통 바슐라르는 집이 단순한 거처가 아니라 기억이 자리를 잡고 보관되는 구조물이라고 보았다. 사람은 시간을 기억하지 못하고 장소를 기억하며, 어떤 시절을 떠올릴 때 실제로 떠오르는 것은 그 시절을 담고 있던 방의 모양이라는 것이다. 

 이 영화가 집을 화면 가운데 두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인물들은 각자 자기 감정을 설명하지 않지만, 그들이 지나간 자리는 남는다. 할아버지의 부재가 실감되는 순간이 대화가 아니라 텅 빈 공간을 통해 전해지는 것도 같은 원리다. 감정을 말로 옮기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공간은 유일한 증언자가 된다. 

여름방학이라는 유예된 시간 

이 가족이 이 집에 머무는 것은 방학 동안만으로 합의된 임시 상태다. 앙리 베르그송은 인간이 실제로 겪는 시간이 시계 눈금처럼 균질하게 흐르지 않으며, 겪는 밀도에 따라 두께가 달라지는 지속이라고 설명했다. 

방학은 정확히 그런 시간이다. 앞뒤의 삶에서 잘려 나온 채 어디로도 이어지지 않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 안에서 가장 큰 변화가 진행된다. 임시라고 규정된 시간이기에 인물들은 이 관계를 정리하려 애쓰지 않는다. 곧 끝날 것이므로 화해도 결별도 미뤄 둔다. 그러나 미뤄 둔 사이에 관계는 이미 달라져 있다. 우리가 인생의 어떤 시기를 나중에야 결정적이었다고 부르게 되는 이유도 대체로 이와 같다. 

지나가는 동안에는 그것이 임시로 느껴진다. 이 임시성은 정서적 조건인 동시에 물리적 조건이기도 하다. 이들이 이 집에 들어온 계기는 애정이 아니라 갈 곳이 마땅치 않다는 사정이었고, 여름이 끝나면 다시 어딘가로 옮겨 가야 한다. 머무를 자리를 스스로 정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시간은 늘 임시의 형태로만 주어진다. 가족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영화가 집을 반복해서 비추는 이유에는 이 사정이 포함되어 있다. 

애도는 사건이 아니라 지속되는 노동이다 

슬픔은 제때 도착하지 않는다 

옥주가 감정을 터뜨리는 지점은 상실의 순간이 아니라 한참 뒤, 예고 없이 찾아온 어느 장면에서다. 이 지연은 서사의 기교가 아니라 애도의 실제 작동 방식에 가깝다. 프로이트는 애도를 감정 상태가 아니라 시간을 들여 수행되는 작업으로 규정했다. 떠난 대상과 연결된 기억을 하나씩 꺼내어 확인하고 놓아주는 과정이 필요하며, 

그 과정은 결코 한 번에 끝나지 않는다. 장례식장에서 눈물이 나오지 않다가 몇 달 뒤 익숙한 물건 앞에서 무너져 본 사람이라면 이 장면의 정확성을 안다. 감정이 부족했던 것이 아니라 아직 순서가 오지 않았을 뿐이다. 슬픔이 제때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냉정한 사람이라 자책하는 일이 얼마나 흔한지를 생각하면, 이 영화가 하는 일은 위로에 가깝다. 

어른도 여전히 누군가의 아이다 

제목의 남매는 옥주와 동주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아버지와 고모 역시 한 쌍의 남매이며, 이들은 각자의 삶이 무너진 뒤에야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온다. 두 세대의 남매가 한 지붕 아래 겹쳐 놓이면서 영화는 조용한 사실 하나를 드러낸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누군가의 자식이기를 그만두는 일이 아니라, 자식인 채로 부모의 부재를 감당하게 되는 일이다. 

 이 구조 덕분에 영화는 성장담의 관습을 비켜 간다. 옥주가 무엇을 깨달았는지 영화는 말하지 않는다. 다만 어른들이 여전히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줄 뿐이며, 그 광경 자체가 열일곱에게는 가장 큰 배움이 된다. 

계속해서 이사를 간다는 것 

이 작품의 영어 제목은 이사와 나아감을 동시에 뜻하는 단어다. 한 시절을 떠나는 일과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 사실상 같은 동작이라는 점을 이보다 정확히 옮기기는 어렵다. 오프닝과 엔딩에 같은 노래가 놓인 배치 역시 삶이 끝나고 다시 시작되는 대신 이어진다는 감각을 만든다. 애도는 완결되지 않는다. 

다만 형태를 바꾼다. 처음에는 일상을 멈춰 세우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 일상 안에 자리를 얻어 함께 흐르게 되고, 사람은 그 상태로 밥을 먹고 웃고 다음 계절로 넘어간다. <남매의 여름밤>이 담담한 얼굴로 증명하는 것은 슬픔의 극복이 아니라 슬픔과 함께 계속 살아가는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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